현대 건축물 중엔 형태가 굉장히 특이한 것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독특해 보이려고 일부러 저렇게 지었나?’ 와 같은 생각이 자연스레 드는 건물들이다. 이상한 건축물, 특이한 건축물, 독특한 건축물을 지어서 세간의 이목을 끌려고 그렇게 지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일견 독특한 형태만을 고려하고 디자인한듯이 보이는 건축물들은, 사실 정반대의 이유로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즉, 형태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디자인이 나온 것이다.
독특해 보이는 건축물들의 형태는 다이어그램에서 파생된 것이다. 다이어그램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는가? 일조 분석 다이어그램, 시야 다이어그램, 버블 다이어그램 등 설계 중 다루는 다이어그램의 종류는 굉장히 많다. 그저 누군가에게 나의 생각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라서 다이어그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이어그램을 통해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개념을 구체화할 수 있고, 생각도 못한 아이디어를 도출해낼 수도 있다.
대학에서 건축을 배우다 보면 교수님들께서 다이어그램을 매우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탄탄한 논리를 쌓고, 합리적인 설계를 위해 분석적인 다이어그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이상의 이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장용순 교수님의 저서 <공간의 위상학>에 따르면 다이어그램의 중요성은 사회가 발전하며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며 강조되었다고 한다. 현대 건축물은 단 하나의 프로그램만을 가지고 설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버스 터미널 같은 경우, 단순히 버스 탑승만을 목적으로 승객들이 왔다갔다 하는 곳이 아니다. 버스 터미널 안에는 편의점, 음식점, 노래방 등과 같은 다양한 상업시설들이 즐비하다. 터미널 안에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휴게 공간도 마련되어 있는 등 버스 터미널이라는 한 건축물 안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화해내야 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이렇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화하기 위해선 다이어그램이라는 설계 도구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한 개의 건축물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중첩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가 고밀화되며 한정된 공간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해진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 도구로써의 다이어그램이 중요시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이어그램과,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독특한 형태를 가진 건축물은 다이어그램이 곧바로 건축물이 된 것이다. 다이어그램을 현실화(rationalize)하는 작업을 거쳐 좀 더 자연스러운 형태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 작업을 거치지 않았기에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 나오는 것이다. 앞서 말한 형태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난 이러한 맥락을 일종의 마케팅이라고 생각한다. 형태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내놓음으로써 더 상업성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사무소의 네임 밸류도 더 올라가지 않겠는가. 물론 모든 특이한 건축물이 이렇게 지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특이한 형태의 건축물이 어떠한 요구와 필요에 의해 다이어그램을 조직하고 그 다이어그램이 곧바로 건축물로 지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형태만을 생각하고 디자인한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도 많을 것이다.
독특한 형태가 나오는 이유는, 다이어그램을 곧바로 건축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이어그램은 왜 그렇게 독특하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바로 관계 그 자체를 다루기 위하다 보니 결과물이 그렇게 나온 것이라고 책에선 말한다. 너무나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얽혀 있는 현대 건축물을 설계하기 위해선 형태만을 사유하는 것이 아닌 관계를 통해 조건들을 풀어내야 한다. 그 결과물을 현실화(rationalization)하지 않고 그대로 낸 것이 독특한 형태의 현대 건축물이다.
이 글은 <공간의 위상학>에서 나오는 내용과 저 개인의 의견이 혼합되어 있으니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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